증산도 진리의 주제가 무엇인가?

“증산도 진리를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개벽이다. 앞으로 오는 가을개벽이다.”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가을개벽의 정신이 상제님이 말씀하신 ‘원시반본原始返本’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원시반본 이념을 중심으로 상제님 도의 실천 정신을 간단히 정리해 주겠다.


원시반본의 다양한 주제들
‘원시반본’이란 무엇인가?

반본返本이란 돌이킬 반 자, 돌아갈 반 자에 근본 본 자다. 즉 근본으로 돌아간다, 근본으로 다시 돌이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반본의 방향성이 ‘원시原始’다.

그럼 원시란 무엇인가?

인간의 역사는 시간성에 매여있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의 실체는 없지만, 현실 삶의 과정에서는 엄연히 과거가 존재한다. 현재 속에 과거의 추억이 있고 상처가 있다.

따라서 인간이 살아오면서 야기된 문제의 근본을 끄르기 위해서는 그 문제의 시원始原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원은 하나의 사건일 수도 있고, 역사적인 인간일 수도 있다. 또는 자기 조상일 수도 있고, 민족의 주신主神일 수도 있다.

원시반본은 한 인간의 문제로 보면 마음의 문을 여는 것, 건강을 회복하는 것, 본래의 밝은 심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예술가라면 자신의 예술적 심성을 신도 차원으로 틔우는 자기 계발 문제 등 여러 과제가 근본의 본本 자에 담겨 있는 것이다.

또 가을이 되면, 한 그루의 초목도 모든 생명 기운을 뿌리로 돌려 열매를 맺으면서, 다음 해 봄철에 씨 뿌리고 농사지을 것을 준비한다.

기도하고 수행하는 것도 원시반본이다. 그런데 ‘아, 원시 반본해야지.’ 하고 21일 동안 청수 떠놓고 기도할 때는, 그 기도의 내용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만이 그 원시반본의 문제를 안다. 그런 경우 스스로 생명의 근본을 떠나지 않으면서 문제를 끌러내야 한다.

이렇듯 우리의 모든 현실 문제를 끌러낼 수 있는 건강한 삶의 지표가 원시반본의 이념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들은 원시반본을 일심이나 하단전 호흡, 바른 호흡, 집중 등으로 얘기하기도 한다. 수행을 하다가 잡념이 생겼다면 원시반본이 안 된 것이다.

요컨대 개인에게는 마음이 근본이 될 수도 있고, 또 주어진 현실 상황에서 보면 경제가 근본이 될 수도 있고, 환경 문제가 근본이 될 수도 있다. 또 직장에서는 인간 관계가 근본일 수도 있고, 녹 지급에 있어서는 월급 문제가 근본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근본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이것이 다 원시반본의 주제들이다.



‘때’를 전제로 한 증산도의 원시반본
그러면 도판에서 말하는 근본은 무엇인가?

선천의 도에서는 일반적으로 궁극적 실재實在, 즉 하늘이 태어난 근원, 땅이 태어난 근원, 인간이 태어난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을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과 인간과 신명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근본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든, 도道라고 말하든, 신神이라고 말하든, 다르마(dharma)라고 하든, 생명이 태어난 궁극적 실재, 근원인 것이다.

뉴에이지 문화에서 서양 사람들이 즐겨 쓰는 ‘큰 근원(the great source)’이란 말도 있다. 어쨌든 그것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질 수밖에 없다.

증산 상제님은 “이 때는 원시반본하는 시대라.”고 하신다. 상제님이 말씀하시는 근본이란 무엇인가?

상제님은 선천의 도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간성을 초월한 궁극적 실재만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다 같이 『도전』 2편 41장 1절을 읽어보자.

이 때는 원시반본하는 시대라.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은 끊임없이 매순간 시간의 과정 속에 떠 있다. 시간의 물결에 휩쓸려 있단 말이다.

‘이 때는 원시반본하는 시대다.’

곧 지금 이 때는 이번 우주 일 년에서 여름철이 지나고 가을로 들어가고 있는 때라는 말씀이다. 가을에는 우주만유가 근본으로 돌아간다.
상제님은 또 “이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로 반본되는 고로 강가가 일을 맡게 되었느니라.”(道典 2:37:5)고도 하셨다.

‘개벽 시대를 당하여 원시로 반본된다!’

지금 상제님은 “개벽 시대를 당하여”, 즉 선천 봄여름철을 끝마치고 가을철로 들어가는 ‘때의 정신’을 말씀하고 계신다. 다시 말해서 성장, 분열의 극에서 성숙, 통일로 들어서는 ‘때의 큰 전환기’의 변화 정신, 도의 변화 정신으로 원시반본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선천의 동서양 불교, 서교 즉 기독교와, 도교, 유교에서도 도를 말해 왔다. 하지만 그들은 ‘때’를 전제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증산도에서 말하는 도의 정신이 선천 동서양의 도가나 종교판에서 구도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중요한 문제가 있다.

한마디로 상제님 도의 근본 정신이 원시반본이다. 이 원시반본 사상, 원시반본의 도를 모르면 앞으로 개벽이 어떻게 오는지 알 수가 없다.




가을은 아버지 시대
“천존天尊과 지존地尊보다 인존人尊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人尊時代니라.”(道典 2:13:3)는 상제님 말씀이 있다.

지난 선천의 봄은 천존 시대다. 서양 문화로 말하면 신존神尊 시대.

동서 문화가 전부 신화神話 시대로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신으로부터 왔다. 생명의 근원, 창조의 기원이 신이다. 동양 문화의 천존과 서양 문화의 신존은 근본이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름철은 지존 문화 시대다. 지존 시대에는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의 삶이 대부분 땅의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또 이 때는 성자聖子 시대다. 약 2천 년에서 3천 년 전에 유불선 서교의 성자들이 등장하여 동서 인류의 문화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섰다.

그 다음 여름철 말에서 가을로 들어가면 아버지 시대다. 동서양 성자들이 외친 ‘미륵불’, ‘앞으로 오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문화가 열린다.

그 시간의 변화 마디가 가을개벽이다. 한마디로 우주 질서가 바뀐다. 이 때 우주의 주재자, 통치자이자 조화옹 참 하나님이신 상제님이 직접 강세하신다. 그리하여 인간의 역사 속에서 천지 질서를 바로잡으신다. 불교의 결론인 미륵불의 용화 세계, 성자 예수가 전한 지상 천국을 이루시기 위해 상제님이 오시는 것이다.

인간답게 사는 길, 원시반본
그러면 상제님은 왜 오셔야만 하는가? 상제님은 왜 오시도록 되어 있는가?

우주 섭리가 그렇게 되어 있다. 상제님은 여름철에서 가을로 들어설 때 오신다.

그렇다면 상제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여시는 새로운 도통 문이 무엇인가? 그 깨침의 경계가 무엇인가?


* 예로부터 상통천문(上通天文)과 하찰지리(下察地理)는 있었으나 중통인의(中通人義)는 없었나니 내가 비로소 인의(人義)를 통하였노라. (道典 2:13:4∼5)


한마디로 중통인의中通人義다!

여기서 ‘가운데 중中 자’는 무슨 뜻인가? 천지의 중심이 인간이라는 뜻이다. 인의人義란 사람 인 자에 옳을 의, 뜻 의, 근본 의 자다.

중통인의!

인간의 근본 되는 모든 문제에 통通하여 완전한 새 문화를 열 수 있는 진리를 내려주신다는 말씀이다. 그 진리가 바로 ‘천지공사天地公事’다.

상제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천지공사’라는 전혀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다. 그리하여 전 인류가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 그 길이 바로 원시반본이다.

이 원시반본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쉽게 보면 또 이렇게 쉬운 진리가 없다.

지금 천지의 어두운 들녘을 서성이고 있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 긴박한 문제는 무엇인가?

참 진리를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촌의 모든 인간이 “옳소!” 하며 박수 갈채를 보내고 환호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진짜 궁극의 진리, 보편의 진리, 만인이 웃으며 “새 진리다! 대도 진리다!”라고 맞이할 수 있는 참 진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지금 어느 때에 살고 있는지, ‘때의 정신’을 밝혀 주는 진리다. 그것이 바로 증산도다.

우리가 상제님 진리를 세상에 전하는 것은 ‘지금이 어느 때인가?’, ‘이 모든 변화는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를 전하는 것이다.

그 중심 주제가 무엇인가?

지금은 개벽기라는 것이다. 원시반본을 하는 가을개벽기이자, 인류 문화의 틀이 바뀌는 대개벽기라는 것이다.



원시반본은 가을의 변화 정신
원시반본의 가장 기본이 되는 첫 번째 뜻은, 무엇보다도 가을의 변화 정신, 가을의 추수 정신이다.

생명이 원시반본하는 이치는 한 그루의 나무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초목은 일 년 사계절, 춘하추동 사시 변화의 질서를 가장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봄이 되면 고목과 같이 죽은 듯한 나무 뿌리에서 생명의 진액, 수액이 쭈욱 뻗어 올라와 생기를 띤다. 참 신비스럽다.

대자연의 생명에 활력을 주는 봄의 신비한 역동성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대지 속 밑뿌리에서부터 생명력이 쭉 뻗쳐 올라 수직으로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잔가지까지 뻗으면서 나무에 생기가 오른다. 모든 것이 생명의 색, 녹색으로 바뀐다.

조금 있으면 계절의 왕 5월이 오는데, 금년은 좀 더워서 그런지 벌써 꽃이 활짝 피었다. 저 남녘에서 서울까지, 꽃이 일제히 다 피어 버렸다.

이것이 여름철 분열의 극의 시간대까지 생장하여 이파리가 하늘을 덮는다.

그런데 생장의 시간이 다 끝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바로 여기서 ‘극즉반極則反’이라고 하는 원시반본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무의 생명 자체인 수액이 다시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도道란 무엇인가? 도의 본성이 무엇인가? 도의 정신이 한마디로 무엇인가?

단순하게 “네 마음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이런 글귀가 있다. “반자反者는 도지동道之動이다.” 곧 ‘돌아가는 것이 도의 운동’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주 일 년의 시간의 물결에 맞추어 무상히 변화해 가는 현상 세계, 즉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볼 때,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것은 때의 정신을 모르면, 인간의 역사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를 모르면 말할 수가 없다. 너무도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돌아가는 것이 도의 운동이다.”라는 말도 반쪽 얘기밖에 안 된다.

“이 때는 개벽 시대를 당해서 원시로 반본한다.”

“이 때는 원시로 반본하는 때다.”

‘이 때’는 바로 상제님이 숱하게 말씀하신 바 ‘천지 가을의 큰 운수로 들어가는 시작점’을 뜻한다. 그러니 누가 뭐라 해도 ‘가을의 정신’, ‘가을의 추수 정신’, ‘대자연의 가을의 변화 정신’ 원시반본인 것이다.

우리는 한 그루의 나무가 가을에 변신하는 모습, 곧 화려한 꽃과 무성했던 이파리들을 다 떨궈 버리고 열매 맺는 성숙의 정신, 추수 원리를 우주 가을개벽의 근본 정신으로 철저히 깨쳐야 한다.



우주 이법을 이념화시킨 증산도 근본사상
증산도의 진리는 선천 문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특성이 있다. 상제님은 우주가 어떻게 둥글어 가느냐 하는 천지 이법을 생장염장生長斂藏이라는 시간의 틀로 드러내 주신다.

원시반본原始返本, 보은報恩, 해원解寃, 상생相生 등 상제님 진리의 주제는 이 우주 원리를 이념화한 것이다. 곧 강증산 상제님이 독창적, 인위적으로 ‘아, 이렇게 하는 것이 인류 문화를 설명하고 동서 문화를 포용하여 통일하는 데 가장 좋겠다.’ 해서 만든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이 상제님 진리로 볼 때 지금은 여름철 말에서 가을로 들어가는 때다.

봄에는 씨 뿌리고, 여름철까지는 기르고, 가을이 되면 봄여름의 진액을 다 거두어 열매 맺는다. 이것이 대자연의 유일한 목적이다.

인간 농사 짓는 우주 일 년의 변화도 초목 농사 짓는 지구 일 년과 동일하다. 그리고 그 목적도 가을에 열매 맺는 것이다.

봄에 인간이 생겨나서 여름철까지 자손을 번식시키고 문명을 개척하며 산다. 그런데 여름철 말이 되면, 가을의 숙살 기운, 서릿발 기운을 받아 초목의 이파리들처럼 목숨이 떨어질 운명에 처한다.

이 가을의 정신에 대해 근본을 꿰뚫으면, 신앙이 성숙한다. 상제님 진리 보는 눈이 확 트인다.

앞으로 오는 우주적인 가을 대개벽, 인간 문명의 틀이 바뀌는 문명사적인 대변혁에서, 그것이 환경 문제가 됐든, 문명이 충돌하는 전쟁 문제가 됐든, 남북 상씨름 문제가 됐든, 원시반본의 도의 정신을 벗어나서는 그 무엇도 설명될 수 없고 인식되질 않는다. 문제의 핵심이 정리 안 된다.

해원解寃, 상생相生, 인존人尊, 정음정양正陰正陽 도수, 선매숭자仙媒崇子 등 증산도 진리의 주제 언어, 사상 언어, 문화 언어가 모두 여름철에서 가을로 들어가는 때의 정신, 가을개벽이라는 천리의 시간 정신에 근본을 둔 것이다.

‘원시반본은 가을이 되면 근본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도의 정신을 이념화한 보편의 사상 언어다.’

이것을 늘 머릿속에 담아둬야 한다.

 궁극의 도, 원시반본
그러면 증산도의 원시반본 정신은 선천 문화와 무엇이 다른가?

지금까지 동서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도를 닦는다, 도를 체험한다.” 하며 평생을 바쳐 명상과 수행을 해 왔다.

하지만 단순히 내가 마음의 문을 부수고 우주의 일심 경계에 들어갔다고 해서, 신성神性의 세계에 영원히 상주하는 법신法身을 얻었다고 해서 도가 다 구해진 것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분명히 기초적인 통通은 성취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도는 통하지 못했다.

 궁극의 도는 무엇인가?

불가로 말하면 미륵불의 도의 세계 기독교로 말하면 아버지 하나님, 천주님의 도 세계 원시반본의 도다.

이 ‘천주’란 언어를 처음 쓴 사람은 동양 사람이 아니다. 물론 산동성에서 강태공이 유불선 이전의 원형 문화, 동방 신교 문화의 팔신제八神祭를 중국 한족 문화에 부흥시킨 예가 있다. 팔신제라 함은 천주天主, 지주地主, 음주陰主, 양주陽主, 일주日主, 월주月主, 병주兵主, 사시주四時主 등 신도神道를 여덟 범주로 나누어 제를 지낸 것이다.

이 때에도 천주가 있었지만, ‘천주’를 신도의 위격으로 처음 쓴 이는 서양의 신부인 마테오리치 대성사님이다. 그분은 동양에 와서 중국말에 통하고 사서四書를 직접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아! 상제님이라는 문화가 있구나. 상제관이 있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분은 서양의 창조주, 성부 하나님과 동양의 상제관에 다리를 놓는 언어로 ‘천주’란 말을 썼다. 천주, 하늘의 주인(the Lord of Heaven)이란 말이다.

이것은 서양의 기독교인들이 2천 년 동안 써 온 언어인 창조주 하나님, 성부 하나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격적인 신의 위격을 뜻하는 언어로 동양적 신관에 접근한 것이다. 그분이 남긴 『천주실의天主實義』란 책을 통해 실학자들이 천주교를 신앙했다.

이 ‘천주’란 말은 동서 신관을 통합하는 매개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호칭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핵심 논리가 없다.

빌리 그레함(Billy Graham) 목사의 『성령론(The Holy Spirit)』이라는 책을 보면, 한 부자간의 대화가 나온다. 그의 친구의 아들이 성부, 성자, 성신도 각기 하나님이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 삼위 일체론은 2천 년 동안 결론이 나지 않은 채 논쟁이 거듭되어 오다가 지금은 쑥 들어가 버렸다.



원시반본은 문제 해결의 대도
우리는 원시반본을 순환의 문제로 얘기한다. 순환이 지속됨으로써 생명이 확보되는 것이다.

지구 일 년도 가을이 되면 초목이 원시반본을 한다. 만약 원시반본을 하지 않거나 거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생명을 지속할 수 없다. 춘하추동 한 주기에서 끝나 붕괴되고 만다.

우주 일 년도 봄여름에서 가을이 되면 원시반본해서 일단 수렴하여 열매를 맺고 겨울에 푹 쉬고 다시 봄을 맞이한다. 이것이 바로 상제님이 말씀하신 생장염장의 도다. 봄여름은 생장하고 가을겨울은 수렴해서 열매 맺어 폐장한다. 문 닫고 봄을 준비하는 것이 폐장이다.

상제님은 가을의 도로서 원시반본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지만 이 원시반본의 가르침에서 우리 삶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안목을 얻는다. 즉, 원시반본은 문제 해결의 길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가령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가을개벽을 모르고, 또 그에 대한 근본적인 깨달음이 없다 해도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바른 길인가?

그럴 때 우리 증산도 신앙인들은 어떻게 말해줘야 하는가?

“그 길은 원시로 반본하는 것이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한번은 우리나라 역사학자 송호수 교수가 이런 얘길 한다.

“아, 증산도는 한 마디로 원시반본이야, 원시반본.”

서울에서 세미나 할 때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우리나라 고대사 찾기를 주제로 말한 것이다. 원시반본의 도에 충실하면 우리 민족의 뿌리 문화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원시반본의 도에 통했을 때, 원시반본이라는 의식의 중심에 섰을 때, 우리 문화의 근본을 회복한다. 국조國祖의 문제, 우리 한민족사의 첫 출발점,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고대 국가의 성립 시기 등을 정확히 밝힐 수 있다.

원시반본은 생명의 존재 법칙
왜 원시반본이 중요한가?

지금은 이번 우주 일 년의 여름철이 지나고 가을로 들어서고 있다. 가을에는 우주만유가 원시반본을 한다, 근본으로 돌아간다.

종도사님께서 “원시반본의 본은 뿌리다, 뿌리!”라고 하셨다. 또 “뿌리를 찾아야 한다. 증산도는 뿌리 문화다.”라고 하셨다.

“이 때는 원시반본하는 때라 혈통줄이 바로 잡히는 때니 환부역조하는 자와 환골하는 자는 다 죽는다.”는 상제님 말씀처럼, 이번에는 자기 조상을 배반하면 다 죽는다.

원시반본의 도는 대자연의 도요, 역사의 도요, 앞으로 열리는 새로운 문명의 도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과 만유의 생명의 도이자 존재 법칙이다.

이 원시반본의 도는 꼭 가을의 정신을 전제로 한 것일 수만은 없다. 왜 그런가? 우주 만유란 태어나는 순간부터 항상 근본을 떠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도의 근본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회귀 본능을 갖고 살고 있고 또 그렇게 살아야 생명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도를 회복한다, 도로 돌아간다 할 때의 도의 본성, 즉 우주가 생겨난 생명의 근원, 빛의 세계, 중도실상中道實相 등을 항상 우리 마음과 생명의 의식 경계에서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건 가장 기본적인 문제다.


원시반본의 실천 이념: 보은, 해원, 상생


한 인간, 생물, 더 나아 지구, 하늘과 땅, 온 우주가 순간순간 변화해 나간다.

그런데 지금의 변화, 때의 정신은 여름에서 가을로 들어가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 열매 맺는, 성숙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원시반본의 도다.

그러면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상제님께서는 해원解寃, 상생相生, 보은報恩을 원시반본을 성취하는 구체적인 실천 이념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있다.

보통 우리는 해원, 상생을 항상 음양적으로 붙여서 얘기한다. 그리고 보은을 세 번째로 말한다. 도운의 초기 시대에도 해원, 상생, 보은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제3변 도운에 들어와 상제님 도를 전하면서 진리의 틀을 다지다보니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은’이 맨 앞에 가야 한다.

왜 그런가?

우리 삶의 질서, 인간 문화의 질서 속에서 원시반본의 정신을 다른 말로 하면 바로 보은이기 때문이다. 은혜를 갚는 것. “반반지은半飯之恩도 필보必報하라, 반 그릇 밥의 은혜도 반드시 갚으라.”는 상제님의 말씀이 있지 않은가.

우리의 삶 속에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신명, 나와 선령先靈, 부모와의 관계에서 볼 때 원시반본의 도가 곧 보은이라는 말이다. 갚을 보報 자에 은혜 은恩 자. 은사, 은혜, 은총이라고 할 때의 은 자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네가 나에게 얼마를 도와줬으니 나도 그만큼 도와준다는, 주고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을 살면서, 내가 신세진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가 아니란 말이다. 상제님이 그런 수준에서 우리에게 보은의 도를 내려주신 것만이 아니다.

 천지 부모에 대한 보은


그러면 상제님은 보은을 어떤 의미로 말씀하고 계시는가?
상제님이 전해 주시는, 원시반본의 도에서 말하는 보은은 무엇인가?

『도전』 6편 82장 5절에 나와 있는 여섯 글자를 또박또박 읽어 보자.

* 도통 천지 보은道通天地報恩 (道典 6:82:5)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상제님이 뜻하시는 이 말씀의 경계를 똑 부러지게 깨쳐서 전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도통 천지 보은’의 참뜻이 무엇인가?
우선 ‘도통’이라는 언어를 떼 내면, ‘천지 보은’이라는 네 글자가 남는다.
‘천지 보은’이 무엇인가? 천지에 은혜를 갚는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천지에 은혜를 갚아야 하는가?

천지는 만물 생명의 근원 되시는 부모이기 때문이다. 태모님도 “천지 알기를 너희 부모 알듯이 하라.”고 하시지 않는가.

사실 기도를 해 보면, 천지는 살아 있는 신神이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서양에서처럼 하늘만 살아 있는 우리 아버지라고 인격신으로 섬긴 것이 아니다. 하늘은 아버지이고, 우리가 태어나 살아가는 땅은 아버지의 짝인 어머니라고 했다. “하늘은 신神이고 땅은 귀鬼다!”, 그래서 살아 있는 성령, 살아 있는 순수 인격, 대자연의 생명체로서 ‘귀신’이란 말을 쓴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유일신 하나님 신관이 들어와서 ‘귀신’이라면 무조건 저급령低級靈으로 내리치는 잘못된 관념이 생겼다.

‘귀신’이란 말은 본래 스케일이 무척 큰 말이다. 신성神性의 음양적 변화의 실상을 체험하고 나서 붙인 정명正名이다. 서양적 표현으로는 ‘성령(the Holy Ghost)’이라는 말뜻과 느낌이 이와 비슷하다.

천지 부모에 대한 은혜를 갚는다!

이 말씀은 결국 인간 생명은 부모와 선령을 넘어서면 하늘과 땅이 그 근원이란 말이다. 하늘땅은 만물의 궁극적 실재, 생명의 큰 집이다. 따라서 천지는 나와 만물의 공통된 생명의 근원으로서 제1의 부모님인 것이다.

그러니 내 생명의 근원에 대한 일차적 보은은 천지 보은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왜 태어났는가?
천지의 열매로서 가을철 천지의 뜻, 그 거룩한 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다.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무엇인가?
오직 하나인 온 우주의 염원을 성취하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대우주 천지 부모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커다란 꿈과 목적을 내려주셨다. 그러니 항상 감사하며 보은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말씀이다.

도통이 천지 보은의 길
“이 때는 원시반본하는 시대다.”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역사 속에 사는 한 인간으로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은 무엇보다 보은이다.

원시반본의 또 다른 말씀이 보은이다. 우리 인간 삶의 제1의 도덕 이념이 보은이다.

그러면 ‘천지 보은’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인가? 그냥 떡 쪄서 올려놓고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먹으면 보은이 되는가?

성숙된 인간 문화, 진화된 인문의 경계에서 볼 때, 가을개벽이라는 천지와 인간 성숙의 과제로 볼 때, 무엇이 보은인가?

천지 부모님께 보은하는 길 크게 보면 하나다.

그것이 무엇인가? 도통道通이다. 도를 통하는 것! 즉 진리를 통해야 한다. “도통 천지 보은”

이 말씀은 다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도통은 천지 보은이다.”

바로 이 때문에 상제님이 인간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지난날 동서의 모든 철인과 부처, 보살들이 이루지 못한 진리의 궁극의 경계, 중통인의의 도통을 이루셨다. 천지의 질서까지도 바로잡을 수 있는 궁극의 도통, 궁극의 진리를 성취하셨다.

천지에 보은하기 위해서는 대우주를 호령하시는 통치자 하나님, 주재자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새로운 도통문을 열어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상제님이 새로운 도통 문화를 여신 것도 천지 부모에게 보은하는 차원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천지 부모의 은혜를 갚는 길은 깨지는 것, 성숙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 성숙의 길은 무엇인가?

진리를 바르게 체험하고 실천해서 진정 천지와 하나 되고, 나아가 천지의 뜻과 목적을 성취하여 진정한 천지의 주인 자리에 서는 것이다. 더 이상이 없다.

우리가 이렇게 상제님 신앙에 몸담고 진리 공부에 적극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천지에 보은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깨짐으로써, 상제님 진리에 대한 기본을 통함으로써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사회 생활도 잘하고, 신앙도 바르게 한다. 저질스런 종말론에 빠지지 않고 올바른 개벽관을 갖는다. 그리고 상제님 진리로써 현실을 바르게 보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진정으로 천하사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 일꾼들의 정신이 분열되어 두리번거리며 시간 깨먹는 건 가장 큰 죄다.

“도통이 천지 보은이다.” 참으로 멋진 말씀이다.


은혜를 저버리면 만 번 죽는다
다음으로 상제님이 보은에 어긋나는 삶의 기준으로 아주 준엄하게 경고하신 한 말씀이 있다.

배은망덕만사신背恩忘德萬死身이다.”

배은망덕은 만사신이라, ‘은혜를 저버리고 덕행을 망각하는 것은 만 번 죽는 몸, 만 번 죽어야 하는 몸뚱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천지에서 너를 낳아 기르는데, 천지 부모님의 뜻을 한 번도 헤아려 보지 않아서야 되겠느냐?’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은 천지 부모의 뜻을 수없이 헤아리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아, 인간이란 뭘까? 인간은 왜 태어나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 거야?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다. 그게 천지 부모에 대한 생각을 세속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은 허망하다. 뭔가 이뤄 놓았다 하고 보면 그게 아무 것도 아니다. 돈에 굶주려서 돈을 벌어 봤다? 그러나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는가.

물론 풍족한 것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거치적거리고 그것 지키느라 신경만 쓰인다.

그리고 공부를 많이 해 봤다, 박사도 몇 개씩 땄다, 그랬는데도 근본은 하나도 안 풀린다? 그러면 여전히 답답함을 느낀다.

 천지는 은혜의 모체


인간이 태어나 진리의 첫 발자국을 떼는 것이 뭔가? 하늘과 땅에 대해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의 마지막 문턱이 무엇인가? 하늘과 땅에 대한 체험이다.
진리의 첫 발자국을 떼는 것과 마지막 관문을 넘는 게 하늘땅으로 시작해서 하늘땅으로 끝난다.

상제님이 일곱 살 때 지으신 시가 있다.

* 遠步恐地坼이요 大呼恐天驚이라
멀리 뛰려 하니 땅이 꺼질까 두렵고
크게 소리치려 하니 하늘이 놀랄까 두렵구나. (道典 1:15:9)


왜 이 시가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이 깊은 뜻을 던져주는가?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상제님의 안목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상제님이 천지공사에서 천지 신명과 인간을 통치하시는데, 그 근본 정신, 도덕률의 제1조가 보은이다.

일본이 왜 원자폭탄 세례를 받고 망했는가? 이번에 개벽할 때 왜 중국이 크게 정리되는가? 이 모든 문제의 해답을 보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제님이 신농씨神農氏와 강태공姜太公의 덕을 말씀하시면서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신농과 태공의 은혜에 보답하게 되리라.”(道典 4:94:5) 고 하셨다.

신농씨는 화덕火德으로 제왕이 된 분이다.

중국의 옛날 장안長安, 지금의 서안西安에서 버스를 타고 두어 시간 가면 보계寶鷄시라는 곳이 있다. 보배 보 자에 닭 계 자. 이름이 참 이상하다 해서 거기를 가 봤다. 거기에 강수姜水라는 강이 있고, 신농씨가 태어났다는 마을이 있다. 그 마을을 가보면 지금도 태곳적 냄새가 난다. 그 마을 윗산에 신농씨의 묘소와 사당이 있다. 사당 안에 들어가 보면 신농씨가 태어나 농사법을 가르치고, 소 몰고 하는 것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그 분은 태양신이다. 태양 속에 봉황이 그려져 있다.

이 신농씨(강씨)가 인간 역사의 성의 원시, 성의 뿌리다. 그래서 상제님께서 “이 때는 원시로 반본되는 고로 강가가 개벽 일을 맡게 됐다.”고 하셨다.

신농씨는 의학의 아버지로서, 또 농사법을 가르쳐 준 시조로서 한량없는 덕을 인류에게 베풀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 ‘신명들이 신농과 태공 두 분의 은혜에 보답하게 된다.’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도 보은과 관련되는 역사의 한 예다.

그러므로 인류의 전 역사 과정이란 끊임없이 은혜를 입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과정이다. 그 속에서 인간과 신명,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보아야 한다.

자연은 보은의 제1의 대상 아닌가. 천지 부모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은혜의 근원이다. 은혜의 모체인 하늘땅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하는가?

자연과 인간의 관계나 모든 생명계의 조화는 보은을 바탕으로 함으로써만 제자리를 잡게 된다.


원시반본의 실천 방법, 해원 상생


그러면 원시반본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길이 무엇인가?

해원과 상생이다. 원시반본은 해원과 상생의 도를 통해서 인간의 역사 속에 달성될 수 있다.

해원의 해解는 푼다, 끌러낸다, 해소한다, 해결한다는 뜻이고 원이라는 것은 원통할 원寃 자다.

상제님은 “선천에는 상극의 질서가 인간과 만물을 맡아 다스렸기 때문에 인간과 신명들이 원한을 맺지 않은 자가 없다.”고 하신다.

원은 남에게 일방적으로,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당하는 걸 말한다. 또 자기 의지로써 저항해 보았지만 역부족과 주어진 여건 때문에 억울하게 당한 걸 말한다.

이렇듯 지난날 선천 상극의 질서 속에서 인간의 삶과 역사 과정에 필연적으로 생겨난 죽음의 요소들, 비극의 근원이 되는 원과 한을 끌러 주어야만 한다. 그래야 원시반본이 이루어질 수 있다. “석가모니가 분명히 도를 통해서 알고는 했으나 창생들의 원통함을 끌러 주질 못했다. 원억의 고를 끌러 주지 못했다.”는 상제님 말씀이 있다.

그런데 상제님께서는 가장 원통하게 죽은, 그래서 인간 역사의 질서가 깨진 한 사람을 말씀하신다. 바로 4천3백 년 전 요임금의 아들 단주丹朱다.

* 원한의 역사의 처음인 당요(唐堯)의 아들 단주(丹朱)가 품은 깊은 원(寃)을 끄르면 그로부터 수천 년 동안 쌓여 내려온 모든 원한의 마디와 고가 풀릴지라...

단주의 깊은 원寃을 그 누가 만분의 하나라도 풀어 주리오. (道典 2:31:4∼7)

『도전』을 수없이 보다가, 어느 날 세수하고 맑은 정신으로 『도전』을 펴고 이런 말씀 한 구절만 보고 출근해 보자.

단주의 깊은 원을 풀면 수천 년 동안의 모든 원한의 마디와 고가 풀린다.”

여기서 단주의 깊은 원에 대한 한없는 감동을 받는다. 역사 인식이 새로워진다. 단주의 깊은 원, 그 기운이 들어온단 말이다.

상제님은 단주를 천상 제왕의 궁전인 자미원紫微垣에 보내셨다. 그리고 앞으로 단주로 하여금 세운世運을 관장하게 하신다.

상생의 도로써 세상을 고친다
* 그러므로 이제 천지도수를 뜯어고치고 신도神道를 바로잡아 만고의 원을 풀며 상생의 도道로써 세상을 고치리라. (道典4:14)


상제님은 병든 세상을 뜯어고치고, 나아가서는 천지의 상극 질서까지 바로잡아 상생의 도로써 새 세상을 여신다고 선언하신다.

이 성구 말씀을 보면, 상제님의 해원, 상생의 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선천 세상에서 갈구했던 진리의 모든 이상이 한갓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잠꼬대란 말이다.

오늘날 중동의 비극을 보라.

‘지상에 천국이 온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다 잠꼬대 아닌가. 이삼일이 멀다 하고 폭탄 들고 가서 “너 죽고 나 죽자. 내가 죽을 테니 너도 좀 죽어 줘야겠다.”고, 자살 폭탄 테러가 벌어지고 있다.

죠셉 캠벨(Joseph Campbell) 같은 사람은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에서 이런 얘길 한다.

“『구약』을 보면 이쪽 페이지에선 야훼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자비를 선포하다가, 몇 페이지 넘어가면 ‘나의 명을 좇지 않는 자는 가서 쳐죽여라.’ 이렇게 나온다.”

그는 이런 신화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이제 새 역사의 가르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신화, 새로운 진리, 우주적인 진리가 나와야 한다. 그것이 증산도, 상제님의 개벽 문화다!

 현실적으로 해원 상생의 문화를 열어야
해원, 상생의 문제는 천도식도 해 보고, 가족과 친인척, 자손을 못 둔 선대 또는 억울하게 죽은 신명들을 잘 모셔드리다 보면, 내면으로 체험을 한다. 자기만이 아는 신도적 체험을 하고 확신을 갖게 된다.

‘원통함을 끌러라, 남에게 미움 사는 일을 하지 말아라. 신명이 먼저 알고 척이 되어서 보복을 한다.’

이런 말씀들이 전부 해원 사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상제님의 해원은 이런 단순한 일상 차원이 아니다.

천지 안에 있는 원 맺혀 죽은 인간과 신명들을 해원시켜 주지 않으면 새 세상을 열 수 없다. 새 세상이 올 수도 없다. 지축이 서서 자연적으로 가을개벽의 시간이 온다 할지라도, 그런 세상이 백 번 천 번 온다 할지라도, 현실 세계는 더 참혹한 원한의 죽음 세계로 빠져들 것이다.

그러므로 ‘새 역사를 만든다, 새로운 문명 질서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실적으로 해원 상생의 문화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 해원 상생의 역사 질서를 구현해야 한다는 말이다.

최근에 정치인들이 인간 관계나 새로운 정치 질서, 정치 문화를 열기 위해 너도나도 ‘상생’이란 말을 쓰고 있다.

하지만 상생은 그것 자체만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것은 반드시 개벽이 전제되고 해원이 함께 실현될 때 이뤄지는 것이다. 해원의 실천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상생이 현실 삶의 모습으로, 회복된 인간 관계로 실현된단 말이다.



해원하는 만큼 상생의 질서가 뿌리내린다
우리 증산도에는 인간 생명과 마음, 삶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모든 문제를 전통적이면서도 전혀 새롭게,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진리 분야가 있다.

그것이 해원, 상생이다. 원과 한의 심리학.

서양에서 인간 심리를 여러 각도로 연구하고 있지만, 사실 현실적으로 볼 때 인간의 가장 큰 관심거리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 염원이다.

그 원과 한의 음양의 대비적 요소를 잘 들여다보고, 짓밟힌 상처, 원통함과 가슴속에 깊이 자라온 한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한恨은 보편적인 정서다. 모든 생명에는 자생自生하는 어떤 본질적인 문제, 인생의 근본 과제 때문에 맺힌 나름의 한이 있다. 이 한의 구조는 굉장히 복잡하다.

예컨대 부모가 일찍 돌아가셔서 영혼의 상처가 있다면, 그게 한이다. 이것은 원통함과는 다르다. 원통함은 피해 의식이 붙지만, 한은 성숙해 나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입게 되는 상처를 말한다. 그런 상처가 축적되어 맺힌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삶의 과정에서 쌓인 원초적인 한이 있는 것이다.

종도사님이 언젠가 “인간은 본래 고독하다.”고 하셨다. 그게 한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인간의 고독! 그것은 홀로 있기에 생기는 것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 속에 앉아 있어도 나 혼자뿐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이 내 생명의 근본에서 해소되지 않는 알 수 없는 한인 것이다.

가령 직접적 체험을 해서 세상과 진정으로 하나될 수 있는 성숙된 생명 의식, 문화 의식, 역사 의식이 자꾸 깨져야 하는데, 진리가 강력하게 열려야 하는데, 이게 잘 안 된다. 그러면 여기서 소위 ‘소외의식疏外意識’이라는 게 생긴다. ‘나는 분리돼 있다. 세상과, 진리와 하나 되지 못하는 어떤 틈이 있다. 그 틈새에 바람이 분다. 그래서 고독하다.’ 이런 걸 느낀다.

이번에 홍콩의 가수 겸 배우인 장국영이 호텔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그의 본성에 깔린 게 바로 이런 문제다. 그가 수백 억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뭐가 부족해서 그런가?

증산도에서는 이렇듯 인간의 역사와 문명, 자연에서 벌어지는 모든 비극의 근원을 원한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이 사회가 됐든 신앙 공동체인 도장이 됐든, 지구촌의 문화 공간이 됐든, 모든 삶의 역사를 원과 한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전개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만큼 상생의 질서가 현실에 뿌리내리게 되는 것이다.

지난 상제님 도의 백 년 역사를 보면, 오선위기로 전개된 세운의 1, 2차 세계대전과 마지막 마무리짓는 제3차 남북 상씨름은 상극의 질서를 해소시켜 가면서 상생의 문화 질서를 열어나가는 과정이다.

 죽든 살든 일관된 신앙을 하라
상생이란 우리 인간이 상호간에 생生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상제님은 ‘살린다’, ‘남 잘되게 한다’는 뜻으로 생을 말씀하신다.


* 우리 일은 남 잘되게 하는 공부다. (道典 2:15:8)

사실 상제님 일꾼을 만나면 인간으로서 모든 걸 이루는 것이다.

‘네가 나를 만나면 너는 인간으로서 모든 걸 이룬다. 내가 너의 꿈을 이뤄주는 상제님의 진정한 일꾼이다!’

바로 그런 일꾼 자리에 서는 것, 이것은 진리에 대한 근본적인 각성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어려운 게 아니다. 단순한 것이다. ‘그런 느낌을 강력하게 갖고 그런 감동이 식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본질적인 깨달음이다.

또 상제님 신앙은 어떤 역경이 찾아왔다고 해서, 가령 부모 형제가 불운한 사고로 참혹하게 죽었다고 해서 그 뿌리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알고 보면 자동차 사고가 났다든지, 깡패를 만났다든지 하는 것은 신앙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신앙을 제대로 하면 태을주 읽으면서 그걸 미리 다 본다. 그렇게 해서 미리 준비를 하게 된다. 신명이 “이 길로 가지 말고 돌아가라.”고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어려운 역경이 오고 실패를 맛본다 해도 좌절하지 않고, 마음을 흩뜨리지 않고 구도의 길을 가야 한다. 신앙은 꾸준히 해야 한다. 죽든 살든, 일관된 신앙을 해야 하는 것이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사람도 신명도 근본 신앙관은 털끝 하나 변함없이 해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일 조금 하다가 뜻대로 안 된다고 정신이 왔다갔다하고 들락날락거리면 안 된다. 끝을 봐야 한다. 거기서 ‘천지일심天地一心’이라는 일심의 경계도 체득한다.

어둠에 빠져 본 사람이라야 광명의 세계를 제대로 안다. 크게 굶주려 본 사람만이 녹의 소중함을 안다.

상생, 상생!

상제님 말씀대로, 포교할 때 우리는 손에 살릴 생 자를 쥐고 다닌다. 개벽의 시간대로 성큼성큼 다가갈수록, 역사가 더 긴박하게 조여들어 갈수록 우리의 사명, 증산도의 존재 이유를 참으로 절실하게 느낀다.

내가 진리를 전해 주지 않으면 저 사람들은 영영 희망이 없다. 아무리 피곤해도 사람들에게 “이 책 한번 읽어 보라.”고, “이 책 속에 세상 둥글어 가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다.”고, “우리 상제님이 개벽공사 여신 것이 담긴 증산도 경전 『도전』을 직접 읽어 보라.”고 권해야 한다.

『이것이 개벽이다』, 『도전』, 도훈 씨디(CD), 도훈 테이프 등 여러 가지를 잘 활용해야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만화책을 줄 수도 있다. 진리를 체계적으로 전해서 깨지게 하는 것이 목적 아닌가.



천지에 보은하는 진정한 인간이 되라
진정 상생의 도로써 가을개벽기에 한 인간을 건져낸다는 것이 얼마나 지고한 사명인가.

<진주만> 영화를 보면, 숨이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병사들의 비극적인 모습이 나온다. 병사들이 물 속에서 “나는 살고 싶다. 죽기 싫다.”고 절규하면서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발버둥치는 걸 보라. 이처럼 생명의 본성은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주어진 여건에서 정말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신의 건강, 환경, 지식, 신앙 이런 것을 돌아보면서, 남은 시간 동안 성실하고, 강력하고, 또 체계적으로, 문화 현실에 알맞은 논리와 언어를 구사해서 전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를 전하면 반드시 정신을 묶어서 일꾼으로 태어나게 하라. 열매 맺는 포교로 천지에 큰 공을 쌓으라. 아까 상제님 말씀 그대로 도통 천지 보은하는 진정한 인간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상제님 도를 꼭 한번 이루겠다는 좋은 마음을 갖고 임해 주기 바란다.

-도기133년 4월 증산도대학교-

 

http://www.jsd.or.kr/?r=jsd

 

증산도(Jeung San Do)

도기 147년 (2017년) 12월 22일 동지대치성과 4차 도전강해 콘서트 스케치 어둠을 밝히는 동지등燈에 사랑하는 가족과 살릴 生 포교 대상자의 이름을 적어서 기원합니다. 무술년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상제님 품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해주옵소서 동지등 아래에서 동지등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는 가족 동지맞이 신앙작품 전시회에서 148년 무술년을 여는 동지대치성 간절한 기도와 염원을 담아.. 동지대치성 증산도의 미래 초립동 종도사님의 도전강해 콘

www.jsd.or.kr

 

 

STB 상생방송 대한독립 운동사

<국학연구소 연구원, 前 인하대학교 연구교수, 중국 연변대학교 역사학박사 임찬경 박사 강의 편집>

 

1910년 국망 이후 독립운동 역사가들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에게 참역사가 없었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신채호, 박은식을 비롯한 독립운동 역사가들은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에 의해 말살되고 왜곡된 참역사를 되찾기 위해 역사 연구와 현지답사를 통하여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노력하였고 이 역사를 바탕으로 독립의 힘을 키우고자 하였다.

 

 

독립운동가의 역사정신

독립운동과 역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독립운동가 이상룡, 박은식, 유인식, 김교헌, 이시영, 김승학, 김창규, 신채호, 계봉우 이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이면서 역사를 연구하고 직접 역사책을 저술했다는 것입니다.

 

 

이 책들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민족의 역사, 특히 우리민족의 고대사와 관련된 문제들을 아주 심도있게 써내려간 책들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역사를 특별히 중시 했습니다. 목숨을 건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역사를 연구하고 저술했는데요. 독립운동가들이 국외에 망명해서 어느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게 되면 거기에 역사책을 만들고 그 책으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면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운동을 위해 세운 학교인데요. 거기서 가장 중요시한 과목이 바로 역사입니다. 역사를 가르쳐서 독립운동의 큰 동력을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역사를 중요시한 독립운동가들은 망명할 때 역사책을 가지고 갔다는 일화들이 많이 전해집니다. 많이 알고 계시는 신채호 이분은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게 되는데요. 그때 가슴에 소중하게 지니고 간 책이 조선후기 안정복이 단군조선부터 고려말까지 다룬 역사책 동사강목(東史綱目)입니다.
 

1911년 1월에 망명한 이상룡이란 분은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땅에 도착하는 그 어려운 망명의 과정에 서점에 들려 만주지지 등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책을 구입하여 본격적인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다음 윤세복이란 분이 계시는데요. 이 분은 망명해서 지금의 중국 압록강 중류 일대에 환인이란 지역에 정착하게 되는데요. 이 분 집에는 엄청난 양의 역사서적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역사서적을 가지고 박은식, 신채호 이런 분들이 역사를 연구해서 훌륭한 책들을 쓰게 됩니다.

 

이렇듯 독립운동가들은 역사를 중시했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저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독립운동

독립운동가들에게 역사란 어떤 의미가 있기에 이렇듯 역사를 중요시했던 것일까요? 독립운동가들에게 역사 연구 및 저술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중요한 독립운동입니다.

 


첫번째 대외적으로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유력한 사상적 무기입니다. 두번째 대내적으로는 반민중적, 반민족적 봉건세력을 비판하여 해체시키는 문화 도구입니다. 세번째 민족 성원을 각성시켜 독립운동 전선에 나서게 하는 교육과 선전의 핵심입니다. 네번째 목숨까지 바쳐서 건설하려는 독립된 자주 국가를 건설하는 청사진이 담긴 것입니다.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은 조선시대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 반성 중에 가장 큰 것이 우리 역사가 조선시대에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다. 이런 반성을 하게 됩니다.

 

고려 중기 이후부터 조선시대를 거치며 사대사관에 의한 우리 민족사의 왜곡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는데요. 신채호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의 어려운 상황은 우리민족에게 역사가 올바로 정립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참역사가 없는 이런 상태가 우리 민족을 어렵게 만들고 일제 식민지로 만들어 가는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당시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시점에 많은 분들,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생각했습니다. 과연 우리가 무슨 문제인가? 일본이 지나치게 잘났기 때문에 우리가 식민지로 전락한 것인가? 이런 문제를 생각한 끝에 우리에게도 문제가 있었다는 결론을 내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 중요한 것은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을 위해서, 독립운동을 조직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했는데요. 그런데 독립운동을 누가 하나요. 바로 이땅의 많은 사람들이 해야 하죠.

 

그렇게 되려면 우리함께 독립운동을 하자고 얘기하고, 사람들을 깨우쳐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되겠죠. 그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역사를 알려줘서 우리민족이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민족은 이런데 현재 지금은 이렇다. 우리민족은 어떻게 나가야 된다. 이렇게 싸워보자.

 



우리민족을 올바로 알고. 자신을 알고. 뭔가 뭉쳐서 싸울 수 있는. 자주적으로 만들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되는데 이것을 역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은 우리역사를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기존의 역사를 돌아 봤습니다.

 
그랬더니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주위에서 찾은 우리역사는 참다운 역사가 없었습니다. 조선이란 시대속에서 우리역사는 너무 많이 왜곡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이 볼 때 조선시대에 나온 역사책들은 하나도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이 역사책들을 우리민족 구성원들에게 얘기해 줘봐야 우리민족이 자존심을 가질 수도 없고, 우리민족의 역사를 제대로 알 수도 없는 겁니다.

 

이런 역사를 가르쳐봐야, 이런 역사를 알고서는 이 어려운 시기에 독립운동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조선에 참 조선사가 없다' 이런 상황을 인식했던 거죠.

 

 

그런데 이런 상황은 일제에 의해서는 오히려 이용당했습니다. 일제는 사대사관을 이용하여 식민사학을 만들어 내는데요. 조선시대 사대사관으로 왜곡된 역사를 한층 더 왜곡시킵니다. 일제가 단시간에 식민사관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데는 사대사관이 있었습니다.

 

식민지 역사로 왜곡시키고 우리 역사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데 거기에 쓰인 것이 식민사관이고 그렇게 만들어진것이 식민의 역사, 식민사학입니다.

 

일제는 이렇듯 조선에 참 조선사가 없는 그런 시대상황을 오히려 악용, 조선고대사를 왜곡하고 조작하여 일제가 조선민족을 문화적으로 영구히 지배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조선시대의 사대사관,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 이것이 바로 그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발견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은 우리가 독립을 위해선 우리의 참역사를 가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먼저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을 동시게 극복하지 않고는 우리역사를 바르게 서술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합니다.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우리 참역사를 정립하는 역사운동 이 자체가 바로 독립운동인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역사를 바로 쓰는 그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우리의 독립운동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에게 이 역사 연구 자체가 또 하나의 중요한 독립운동이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나서야 할 때

그렇다면 2019년의 오늘 날은 어떨까요. 광복 74주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오늘. 독립운동가들의 역사, 그 정신이 제대로 계승되고 있을까요? 안타깝지만 아직도 사대사관, 식민사관에 의해서 만들어진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독립운동가의 역사서술은 묻히고 식민사관은 그대로 존속 되었습니다. 청산되어야 할 역사적 적폐는 소위 '통설'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사회 역사학계를 장악했습니다. 지금 학국사회의 역사학계는 조선시대의 사대사관과 일제강점기의 식민사관 등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채, 그 적폐들을 심화시켜 기형적인 모습으로 오히려 우리 역사의 정립(正立)을 오히려 방해하는 주범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한국 학계에서는 독립운동가의 역사학, 역사 정신을 총체적으로 민족주의 역사학, 민족주의 사학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용어에는 세심히 살펴봐야 할 심각한 함정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민족주의란 이름을 붙여서 오히려 독립운동을 위해 서술했던 역사의 특성이라던가 계승해야 될 여러가지 장점들을 사회속에서 오히려 잊혀지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민족주의 사학이라는 용어는 독립운동가들이 만든게 아니고 학계에서 만들어낸 용어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살아 계셨다면 자신의 역사학에 민족주의사학 이렇게 붙이는걸 결코 원치 않으셨을 텐데요.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을 위한 방법론으로 '침략적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저항적 민족주의'를 선택했던 겁니다.

 

 

이 민족주의는 수단 혹은 방법이지 독립운동가들의 궁극적 목적이 민족주의가 아니었습니다. 민족주의 선택의 궁극적 목적은 독립운동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연구, 역사 결과들은 민족주의사학이 아닌 독립운동사학으로 불러야 합니다.

 

또 다른 이유로 시간이 지나면서 민족주의의 부정적인 면을 사회에서 부각시킵니다. 우리민족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나쁘게 표현할 때 쓴다던지, 민족주의를 가진 사람을 오히려 이상하게 보는 시각을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면서 '민족주의사학'이란 이름으로 이 독립운동가들의 역사학을 사회에서 조명되지 못하게,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민족주의사학이란 용어대신 독립운동사학으로 불러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역사는 독립운동사학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연구, 서술했던 역사, 역사정신을 되돌아 보고 더 나아가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을 청산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며 우리민족의 올바른 역사를 정립해야 합니다. 이제는 때가 됐습니다. 잘못된 역사를 극복하고 우리에게 과제처럼 남겨진 우리 역사 바로쓰기.

 

이제는 우리가 역사광복군으로  나서야 될 때입니다.

 

 

 

<강의 전체 보기>

https://youtu.be/pytcajL3RBg

 

대한독립운동사 10회 독립운동가의 역사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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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지구촌 동서문화 시원사상 경전


오늘 주중에 하루 종일, 잃어버린 우리 시원 역사 문화정신을 복원하는 데 함께해 주신 데 대해서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오늘 소중한 연구 결과를 내주신 모든 분들과 함께 감동하고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우리의 역사 전적들을 다시 한 번 깨어나서 꼼꼼히 챙겨보게 되었습니다. 

동서고금의 역사, 문화, 철학, 소중한 성자들의 말씀, 종교, 그 속에 담겨 있는 창조관, 인간관, 세계관 이런 모든 가르침의 원본, 문화의 원본이 『환단고기』입니다. 『환단고기』는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의 문화 원전 의미가 복합돼 있다고 봅니다. 

오늘 준비한 것은 많지만, 그 골수만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결론은 역사전쟁입니다. 동북아 역사문화 주도권 대전쟁입니다. 인류의 시원 창세 역사, 원형문화를 복원하는 새로운 전쟁입니다. 이것을 동력원으로 하여 앞으로 남북 통일시대를 넘어 지구촌 동서 통일 문명권 시대, 즉 개벽시대를 맞이합니다.

공공철학公共哲學을 전공하신 충북대학교 김태창金泰昌(1934~ ) 명예교수님이 「어느 철학자의 부끄러운 이야기」라는 글에서, 자신이 국내는 물론 해외를 다니면서 학문 활동을 해보면 철학의 빈곤을 아주 뼈저리게 절감하고, 참담한 심정에 빠질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유명한 서울대 철학과 박종홍朴鍾鴻(1903~1976) 교수가 독일의 실존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1889~1976)의 초청을 받았을 때 있었던 일화를, 어떤 신부님의 회고담에서 읽었다면서 소개했습니다. 

평생을 ‘존재Sein’를 화두로 해서 인류의 밝은 정신의 빛을 복원하려 한 하이데거가 그때 박종홍 교수에게 뭐라고 했는가? 

 

‘나는 중국철학도 좀 들어봤고 일본철학도 들어봤다. 그런데 한국철학은 근원철학radical philosophy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한 문서가 「천부경」이라 하더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천부경」을 직접 내놓고 ‘이것을 좀 해석해 달라’고 했는데, 박종홍 교수는 서양철학만 공부하고 한국의 시원 역사와 철학 공부를 제대로 안 했기 때문에 해석해 주지 못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인구에 회자하는데, 하이데거가 과연 「천부경」을 읽었는가? 저 유명한 20세기의 대표적인 하이데거 대철인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자신의 무사상無思想을 실제로 「천부경」에서 가져왔습니다. 「천부경」은 이미 20세기 초엽에 서양에 건너가서 유럽문화 정신사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것입니다. 

 

「천부경」은 우주 진리 경전
그러면 「천부경」은 어떤 경전인지, 세 가지로 간단히 정리를 해 봤는데요. 

첫째로 「천부경」은 ‘우주 수학 원전’입니다. 인간과 우주의 수수께끼를 수로써 정의한 거예요. 1에서 10까지 열 개의 숫자를 가지고 진리를 정의한단 말입니다. 이 얼마나 신나고 놀랍고, 진리를 탐구하는 우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가? 열 개의 숫자로써 그동안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진리의 근본 명제,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향하는 근대사의 진리 중심 주제 ‘개벽’에 대해서 이미 약 1만 년 전에 인류문화 원전 「천부경」에서 놀랍게 정의를 한 것입니다. 대개 한 글자 내지 두 글자, 많아야 네 글자로 너무도 간명하게 되어 있는데, 우리가 암송을 하면서 어느 날 「천부경」의 그 진리 맛을 제대로 알면 나름대로 크게 느끼는 정서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우주 신학 원전’입니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신을 삼신이라 한 것은, 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 철학적이며, 종교적이고 구도적이며, 신의 실상에 어울리는 명쾌한 정의라고 봅니다. 여기서 삼신을 우주관의 언어로, 삼극사상三極思想으로 전개하는데, 이건 정말로 놀라운 거예요. 

셋째로 「천부경」은 동서의 종교, 과학, 철학사상의 ‘인류 문화 원전’입니다.

 

(안경전 종도사님 말씀, 월간개벽 20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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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여 년 전, 백두산에 가서 들은 이야기다. 9월인데도 백두산 근처는 으시시 추웠다. 백두산에서 내려와 그 근처 호텔에서 숙박을 하면서, 경주에 산다는 산부인과 의사와 대화를 하게 됐다. 우리 종도사님이 그 기운을 보시고 물으셨다. “그래, 선생은 애를 몇이나 긁어냈소?” 그러니까, “평생 아마 한 3만 명은 긁어냈심더.” 한다. 하, 아무렇지도 않게 3만 명을 긁어냈다, 3만 명을 죽였다는 거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평균 몇 명씩 긁어내는가?

내가 어떤 통계를 보니, 남한에서만 1년에 이백만 명을 긁어낸다고 한다. 게다가 산부인과 의사들 얘기를 들어보면, 비공식적으로 행해지는 낙태가 워낙 많아서, 그게 플러스 알파 수십만이다.

그러면 도대체 지구촌 뱃속 살인은 얼마인가?

유엔에서 공식 통계로 나온 걸 보면, 1년에 2억의 생명이 어머니 뱃속에서 생겨나는데, 그 가운데 4분의 1이 조금 넘는 약 5천5백만 명을 뱃속에서 죽인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때 지구촌에서 전쟁하다 죽은 수보다 많다. 2년이면 한 1억 이상을 살해하는 거다. 누가? 자기를 만든 어머니 아버지가.

우리나라에서 일 년에 뱃속 살인하는 게 이백만이면, 하루에 얼마인가? 약 오천 몇백 명 된다.

아, 열차가 탈선해서 몇백 명 죽었다, 자동차가 충돌해서 몇백 명 죽었다, 비행기가 추락해서 몇백 명 죽었다 해도 전국이 초상난 것처럼 들썩들썩 난리가 나지 않는가.

헌데 뱃속에 있는 아이들을 하루에 오천 몇백 명이나 가위로 칼로 다 절단해서 몸을 해체해 가지고 뽑아낸다. 그렇게 살해당하는 것은 교통사고로 죽거나, 박치기해서 팔다리 부러지고 눈이 빠져 죽는 것보다도 백 배 천 배 참혹한 죽음이다.

 


수행을 해서 신도를 보면, 그 영이 그대로 있다. 해체되어 몸뚱이는 다 잘라지고 찢어졌지만, 그 영체, 신명은 피를 흘리며 그대로 다닌다.

며칠 전 아홉 시 뉴스에도 이런 게 나온다. 우리나라 여고생들 가운데 임신한 경험이 열 명에 하나라던가. 내 잘못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서 몇 번씩 임신을 하고 애를 긁어낸다고.

헌데 그 신명들이 정상적으로 살 수 없으니까 몰려다니면서 자살을 한다. 자기를 소멸시키는 거다. 이게 신명의 자살사건이다.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박치기를 하거나, 전쟁터에 가서 쏟아지는 포탄에 몸을 던져 자기를 해체시킨다.

그래서 상제님이 예로부터 처녀나 과부의 사생아와 그 밖의 모든 불의아의 압사신(壓死神)과 질사신(窒死神)이 철천의 원을 맺어 탄환과 폭약으로 화하여 세상을 진멸케 하느니라.”(道典 2:52:2∼3)고 하신 것이다.

지금 이런 신명들이 지구촌을 다니면서 온갖 재난을 뿌리고 있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교통사고 일어나고, 또 죽음의 충동이 일어나 아파트에서 손잡고 뛰어내리고, 자살 사이트 만들어 동반해서 죽고. 자살하는 건 모두 척신이나 그 집안의 자살귀신이 붙어서 그러는 거다.

 

-종도사님 도훈 (2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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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어서 말하면 증산도는 지나간 세상을 정리하고 앞으로 오는 좋은 세상의 틀을 짜 놓은 곳이다. 

 

지나간 세상은 상극이 사배해서 살기가 살벌했던 세상이다. 오늘날까지도 그렇지 않은가. 요즘 세상에 대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롱 세상에 나이롱 사람에 나이롱 물건! 전부가 가짜라는 소리다. 

 

천지이치라 하는 것은 공명정대한 것이다. 

 

이치란 사필귀정(事必歸正), 일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꼭 바른 데로 돌아가게 되어져 있다. 거짓은 절대로 성사가 될 수가 없다. 혹시 성사가 된다 하더라도 결국 들통이 나고 만다. 

 

지나간 세상은 천지이법이 상극이 사배를 했다. 사람은 누구도 천부적으로 이 세상에서 자유를 향유하면서 한 세상 살려고 왔는데 세상 환경이, 판이 그렇게 짜져 있지를 않았다.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타의에 의해서, 남의 뜻에 의해서 살다가 갔다. 그 신명들이 철천지한을 맺어서 원신과 역신이 하늘땅에 가뜩이 찼다. 

 

신명은 여러 천 년, 여러 만 년이 가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몸은 생로병사에 의해 그저 조금 살다 가지만 신명이라 하는 것은 자기 닦은 바에 따라서 무제무한으로 오래오래 산다. 

 

그 신명들이 다 한을 품었다. ‘나 하고 싶은 일을 하나도 못 해보고 남의 뜻에 의해서 죽었다. 전쟁에 끌려가서 다 죽어버렸다. 너무 억울하다!’ 하고 말이다. 

 

그 신명들부터 먼저 해원을 시켜줘야 인간 세상도 좋은 세상을 만들 수가 있다. 바탕이 그렇게 되어져 있다. 

 

그래서 상제님이 신명공사로 신명부터 해원을 시켜서 좋은 세상을 만드신다. 신명을 해원시켜줘야 상생(相生)을 하고, 상생을 시켜줘야 보은(報恩)도 한다. 또 원시반본(原始返本)을 하는 게 가을의 근본 틀, 본질이다. 

 

상제님은 신명해원공사를 시켜주시기 위해서 신명들을 전부 모아 신명정부를 건설하시고 거기에서 세상 둥글어갈 틀을 짜셨다. 상제님이 그걸 천지공사라고 이름을 붙이셨다. 

 

상제님 말씀이 “이제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쳐서 물샐 틈 없이 도수를 굳게 짜놓았으니 제 한도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린다.”고 하셨다. 

 

이 세상 틀이 그렇게 되어져 있다. 상제님이 천지공사 보신 이후 이 세상은 상제님이 천지공사에서 프로그램, 시간표, 이정표 짜신 그대로만 둥글어간다. 그 시간표, 이정표를 짜 놓으신 것이 인간 세상에 현실역사로 표출이 된다. 

 

- 135년 7월 31일 개벽문화한마당 태상종도사님 도훈

 

사람은 누구나 삶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행복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행복의 언덕을 오르려다 운명의 파도에 밀려나 좌절 당하고 슬픔에 젖어, 삶의 무의미와 무능력에 자학하며 허무의 독감을 앓을 때 가슴에 사무치도록 와 닿는 의문의 물음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며, 살아야 할 그 명분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인생의 실존문제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이 고뇌 속에서 본능적으로 부르짖는 이러한 문제들은 수수천년 동안 많은 성인과 철인들이 해답을 구하여 왔으나 속 시원히 풀린 것은 아직 없습니다.

 

 

이는 오직 천상 보좌에서 인간으로 오신 강증산 상제님의 가르침으로만 온전하게 풀릴 수 있습니다. 증산도 도전 성구에 나와있는 상제님의 말씀을 통해 영혼의 세계, 신(神)의 본 모습, 신도세계의 구성, 인간과 함께 해 온 신의 역사 등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결국, 조상신의 존재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제사 모시기의 당위성을 깨닫고, 더 나아가 가을개벽기 구원의 실마리를 풀어 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과제입니다.

 

죽음,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죽음이란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뿐 인 사건으로, 생명 활동이 정지되어 다시 원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는 생生의 종말을 뜻합니다. 그런데 상제님께서는 사람이 죽는다고 아주 죽는 것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죽음은 육신이라는 껍데기를 벗는 것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죽으면 아주 죽느냐? 매미가 허물 벗듯이 옷 벗어 놓는 이치니라. (10:36:2)

 

사람이 죽으면 그냥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육체라는 ‘겉사람’만이 아니라, 그 안에 ‘속사람’ 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사람을 혼魂과 넋魄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혼魂과 넋魄이 있어 혼은 하늘에 올라가 신神이 되어 제사를 받다가 4대가 지나면 영靈도 되고 혹 선仙도 되며, 넋은 땅으로 돌아가 4대가 지나면 귀鬼가 되느니라. (2:118:2~4)

 

 

 

혼과 넋은 우리 몸속에 있는 영체의 음양적인 두 요소입니다. 혼은 하늘 기운을 받아 생겨나고, 넋은 땅의 기운을 받아 생겨난 것으로, 이 둘은 다 무형입니다. 사람이 죽어 숨이 떨어질 때 따뜻한 기운이 빠져서 하늘로 올라가는데, 그것이 혼입니다. 의학박사 맥두걸D. MacDougall은 실험 결과 ‘사람이 숨을 거둘 때, 수분과 공기의 무게를 제외하고도 살아 있을 때보다 체중이 21g 가량 줄어드는데, 이것이 영혼의 무게다’라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American Medicine』)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서 영적 요소가 빠져 나갔음을 말해 줍니다.

 

이 혼백의 세계에 대해 상제님께서 어린 호연에게 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하루는 비가 내리니 한 성도가 약방 사랑에서 비를 구경하다 잠이 들거늘, 상제님께서 호연에게 가만히 오라는 손짓을 하시므로 호연이 다가가니“가만 앉아 봐라. 저것 봐라, 저것! 저 사람 콧구멍에서 나오는 것 좀 봐라.”하고 속삭이시니라. 호연이 신안이 열리어 보매 꼭 생쥐같이 생긴 것이 콧구멍에서 토방까지 나오더니… 다시 콧구멍으로 들어가고, 또 나왔다가 들어가고, 그러기를 계속하는지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것이 사람의 혼이여. 저것이 하나라야 내 본심이고, 둘이면 도둑놈이다.”(4:121:1~5)

 

참으로 신비스런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하늘 기운을 받아서 생겨난 혼은 몸을 떠나 하늘로 돌아가고, 땅 기운으로 생겨난 넋은 땅으로 돌아갑니다. 혼과 넋의 차원에서 정의하자면, 죽음은 천지 부모의 기운을 받아 생겨난 영적 요소인 혼과 넋이 분리되어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 4대가 지나면

 

‘사람에게는 혼백이 있고, 죽음 후에는 그 혼백이 하늘과 땅으로 돌아간다,’이것만도 참으로 놀라운 소식입니다. 그런데 상제님께서는 혼백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 하는지도 밝혀 주셨습니다.

 

즉 사람은 죽은 뒤 신神, 곧 신명神明이 되어 천상에 살면서 잘 닦아 4대가 지나면 영靈도 되고 선仙도 됩니다. 영은 백광처럼 아주 환하고 밝은 존재입니다. 보통 1대를 30년으로 잡으므로 4대는 약 120년입니다. 신명으로 살면서 백 년이 넘도록 도를 잘 닦으면, 태양 빛과 같이 눈부신 영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영은 일반 신명보다 훨씬 더 영적 진보가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면 선仙은 영靈과 어떻게 다를까요?

 

그것은 같은 경계이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선은 도를 닦아 영적 수준만 높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이 되려면 세상에 공덕을 많이 베풀어야 합니다. 선은 영원불멸하는 인격적 영신입니다. 선은 사람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땅속으로도 가고, 물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자유자재로 생각대로 움직입니다. “나는 이 머리카락 하나만 있어도 거기 붙어서 나오느니라”(10:16:3)라 하신 상제님의 말씀이 선仙의 세계에 대해 다하신 말씀입니다.

 

땅으로 돌아간 넋은 죽은 육신과 함께 땅 속에 머무르다가 4대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귀鬼로 변모됩니다. 이 귀는 천상의 신과 결합하여 사후의 생명체라 불리는 귀신鬼神으로 거듭나기도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서구 유일신 문화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귀신을 저급한 신으로 취급하지만, 귀신은 본래 그 본질이 천지에서 형상을 갖고 나온‘천지의 성령holy ghost’입니다. 그래서 천지의 자녀인 인간 마음에 따라 감응을 합니다. 귀신이 때로 살아 있는 사람의 화복禍福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과학자들도 인간 몸 속에 육체와 별도로 속사람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속사람을 유체(幽體, Astral Body)라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육체와 유체가 하나로 포개져 있지만 잠을 잘 때나 큰 충격을 받을 때, 혹은 수술을 할 때는 속사람인 유체가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때 육체와 유체는 광채가 나는 은백색을 띈 생명선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선을 '혼줄' 또는 '영사(靈絲)'라고 부릅니다.

 

이 혼줄은 보통 양 눈 사이에서 나오며, 영체는 머리 뒷쪽 연수(延髓)에 붙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혼줄은 영체와 같은 모습을 한 에테르체이며, 고무줄처럼 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처음 유체가 이탈할 때 혼줄의 굵기는 발광까지 합치면 15cm 정도로 보이며 영계나 외계 우주로 멀리 가 있을 때는 가는 실 정도로 얇아진다고 합니다.

불가에서 도승들이 몸은 그대로 두고 영신(靈身)만 가지고 천상이나 외계의 우주세계로 여행하는 것을 '시해법(尸解法)'이라 하는데 이것도 영체이탈과 동일한 것입니다.

일부 학자들의 측정에 의하면, 속사람의 무게는 60 ~ 70 g 정도라고 합니다. 이것은 영체도 물질적 성질을 조금은 지니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근본 이유는 육체에 의해 생성 공급되는 체내의 기혈(氣血) 작용 때문입니다.

 

 

영체는 그 자체에서 생명의 빛을 발산합니다.이 발광현상을 후광(後光, 오오라 Aura)이라 합니다. 속사람인 영체는 이 빛에 둘러 쌓여 있는데, 그 색체는 선천적인 영격(靈格)과 심령 진화의 정도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 색상 자체가 속사람의 옷입니다.모든 살아 있는 생물체에는 이 타오르는 생명의 불길(후광)이 하늘거립니다. 식물, 동물 등 초록빛의 풀잎이나 한 마리의 쥐에서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영국의 키르너(Walter Kilner) 박사는 속사람이 뿜어내는 생명의 불빛(오오라) 색상에 따라, 그 사람의 건강상태와 성격과 인품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으며, 그의 연구소에서는 키르너 스크린이라는 청남색의 특수안경을 만들어 누구든지 밤하늘의 은하와 같이 빛나는 이 빛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참 모습, 신명

 

인간은 천지 부모로부터 생명을 받아 태어나 살다가 천지 부모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도 신명神明이 되어 계속 살아갑니다. 땅은 인간의 삶의 무대이고, 하늘은 신명의 삶의 무대입니다. 지상의 인간 세계와 보이지 않는 하늘의 신명 세계는 밀접한 연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특히 조상 신명은 내 생명의 뿌리로서 나를 낳고 길러 주신 분들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올라가 신명이 됩니다. 이러한 신명은 개별적인 인격신입니다. 신명은 빛과 같이 밝은 존재인 까닭에 상제님께서는‘밝을 명明자’를 써서 즐겨‘신명神明’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신의 본성이 밝다 보니, 밤중에 시커먼 옷을 뒤집어쓰고 다니는 도적신도 신안神眼으로 보면 번쩍번쩍 빛이 납니다. 신명의 오라aura 자체가 밝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명이 사는 곳은 인간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계와 신명계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음양陰陽짝으로 존재합니다. 인간계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세계이고, 신명계는 영적인 눈[神眼]으로 볼 수 있는 세계입니다. 『홀로그램 우주Holographic Universe』를 지은 탤보트M.Talbot의 표현을 빌면, ‘드러난 질서’ 에따라 돌아가는 세상이 인간계이고, ‘감추어진 질서’ 에 따라 돌아가는 세상이 신의 세계입니다.

 

선천 세상을 살다간 성자들도, 범부중생도 다 천상에 신명으로 살아 있습니다. 상제님은, 성자가 됐든, 학자가 됐든, 범부가 됐든 ‘누구누구 신명이다, 아무개 신명이다’ 하여 그 이름이나 관직에 신명이라는 두 글자를 붙여서 부르셨습니다.

 

증산 상제님과 태모 고수부님의 말씀을 수록한 『도전』을 보면, 삶과 죽음, 죽음 후에 맞이하는 제2의 삶, 제사, 천상과 지상을 오가며 자기 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윤회의 실상 등에 대해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늘에 가면 그 사람의 조상 가운데에서도 웃어른이 있어서 철부지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듯 새로 가르치나니, 사람은 죽어 신명(神明)이 되어서도 공부를 계속하느니라. (9:213:4∼5) 


특히 이 한마디 말씀을 통해, ‘공부’ 즉 구도 과정은 이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 계속되는 천상 삶으로까지 이어지며, 또한 지상의 인간이든 천상의 신명이든 삶의 참 목적은 모두 ‘득체 득화 득명(得體 得化 得明)’의 진리체험에 있다는 것을 확연히 깨칠 수 있습니다

 

 

신도세계에 대한 우리말

 

 ● 돌아가시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넋은 땅으로 돌아간다.

 ● 혼(魂)나다: 혼이 나갈 정도로 꾸지람을 듣다.

 ● 혼비백산(魂飛魄散)할 뻔했다:  즉 혼이 날아가고 넋(백)이 흩어질 뻔했다.

 ● 신나다, 신명나다: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가 되다

 ● 귀신(鬼神): 귀(鬼) + 신(神). 증산 상제님께서는 신명(神明)이란 말을 즐겨 쓰셨다. 

 

 

영화로 보는 신명神明의 세계  

 

 

뮬란 (Mulan)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터로 나간 파씨 가문의 외동딸 ‘뮬란’이 용맹과 지혜를 발휘해 외적으로부터 나라와 황제를 구한다는 중국의 전설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전쟁터로 나가는 뮬란을 보호해줄 가문의 수호신을 잠깨우고자, 파씨 가문 조상신들이 종친회를 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충열전기 양가장 (Yang`s Saga)

거란조의 송나라 침입에 맞서 싸운 충렬지사 양가장이란 실존인물을 소재로 한 무협액션물. 옥황상제를 위시하여 여동빈 등 당대 최고의 신선들이 인간 세상에 역사하는 장면들이 볼만하다. 

 

은행나무 침대 (The Gingko Bed)

궁중악사와 공주의 이룰 수 없었던 사랑! 천년의 시간이 흐른 현세에까지 사랑하는 이를 찾아 헤메이는 한 영혼의 애절한 이야기.

 

천국보다 아름다운 (What Dreams May Come)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지옥행을 불사하는 한 남자의 애절한 사랑이야기. 천국과 지옥을 묘사한 장면들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영혼은 그대 곁에 (Always)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거나 발명을 할 때, 보호신이나 문명신의 도움이 함께 한다는 것을 일러주는 영화.

 

식스 센스 (The Sixth Sense)

영혼을 볼 수 있는 초인적 능력을 가진 소년이 어둠의 영혼에게 시달리면서 그와 관련된 기괴한 일들을 다룬 영화.

 

프라이트너 (The Frighteners)

혼령과 의사소통을 한다는 자칭 심령술사가 연쇄살인범인 악귀를 쫓아 영혼의 세계로 뛰어든다는 내용. 육신에서 혼이 빠져나가 천상 신명계로 가는 장면이 잘 그려졌다.

 

자귀모 (Ghost In Love)

사고로 죽은 주인공이 ‘자귀모’(자살한 귀신들의 모임)에 가입해 자기를 배신한 애인에게 복수한다는 내용. 원한 맺고 죽은 숱한 신명들이 일으키는 인간세상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다루었다.

 

애니메이션 천녀유혼(A Chinese Ghost Story)

영화 〈천녀유혼〉 시리즈를 상당부분 새롭게 재구성한 에니메이션. 끝장면에 주인공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인간의 몸을 받아 내려오는 과정이 눈여겨볼 만하다.

 

원령공주 (Mononoke Hime) 

중세의 일본을 배경으로 근대화 과정에서 숲을 파괴하려는 인간들과 숲의 정령을 보호하려는 원령공주와의 필사적인 싸움을 그린 애니메이션. 숲 속 다양한 신들의 출현이 볼만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Spirited Away)

인간세상의 놀이공원이자 800만 신들의 온천장인 곳에서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부모를 구해 인간세상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 나무의 신, 강의 신 등 형형색색의 신들이 캐릭터로 등장한다. 

 

 

 

 

도전 산책 | 사후 세계 이야기

얼마 전에 ‘신과 함께’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신관을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하여 재미와 감동을 준 작품이죠. 국내뿐만 아니라 대만,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와 북미, 중남미, 유럽, 오세아니아 등 해외 각지에서 개봉을 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우리 원형문화의 사후 세계관에 대해 표현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데요. 인간의 유한한 삶 속에서 거부할 수 없는 이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누구나 마음에 품고 있는 의문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러한 사후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들을 『도전』 말씀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죽음의 의미

 

삼성의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은 1987년 타계 한 달 전에 천주교 한 신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영혼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세상의 부귀와 권세, 명예를 누렸던 그도 어쩌면 평생 가슴에 품고 있었을 질문을 죽기 전에 했던 겁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한국 최고의 임사 체험 연구가이며 한국죽음학회 회장인 이화여대 최준식 교수는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는 유력한 증거를 다섯 가지로 알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세계 종교들이 모두 사후 세계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 
둘째는 영능력자(신비가)들이 전하는 사후 세계 이야기들이 증거이며 
셋째는 의사들도 사후 세계를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최면을 통해 사후 세계나 전생, 윤회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고
다섯째는 임사 체험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수백만 건이나 된다는 사실은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꼽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죽음과 삶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진짜 제대로 된 삶을 살려면 죽음을 알아야 된다.”고 말합니다. 죽음과 삶은 둘이 아니라는 말에 저도 감동을 받았는데요. 삶과 죽음에 대해 상제님은 말씀하십니다. 

生由於死(생유어사)하고 死由於生(사유어생)하니라. 
삶은 죽음으로부터 말미암고 죽음은 삶으로부터 말미암느니라. 
사람의 죽음길이 먼 것이 아니라 문턱 밖이 곧 저승이니라. (도전 4:117)


이승에서의 죽음은 저승에서의 삶이 되고, 저승에서의 죽음은 이승에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지상에서 여러 생애를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한 번의 삶으로 모든 것을 마치는 게 아니라 여러 생애를 살아감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영혼의 성숙을 위한 것입니다.

명부 세계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게 되죠. 죽음 이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죽어서 처음 가게 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을 명부冥府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상제님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3죽는 것도 때가 있나니 그 도수를 넘겨도 못쓰는 것이요, 너무 일러도 못쓰는 것이니라. 나의 명으로 명부에서 데려오라고 해야 명부사자가 데려오는 것이니 각기 닦은 공덕에 따라 방망이로 뒷덜미를 쳐서 끌고 오는 사람도 있고, 가마에 태워서 모셔 오는 사람도 있느니라. 또 하늘에 가면 그 사람의 조상 가운데에서도 웃어른이 있어서 철부지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듯 새로 가르치나니 사람은 죽어 신명神明이 되어서도 공부를 계속하느니라. 죽었다고 당장 무엇이 되는 것은 아니니라. (도전 9:213)#}

명부는 지상 인간의 수명을 주관하고 죽은 자의 죄악과 공덕을 심판하는 천상의 법정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살다 보면 죄를 짓기도 하고 좋은 일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심판을 명부에서 받게 되는데요. 워낙 죄를 많이 지은 사람도 있고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에 따라 방망이로 목덜미를 쳐서 끌고 가는 사람도 있고 가마에 태워 모셔 가는 사람도 있다는 말씀이 놀랍습니다. 

선령신의 인도


또한 사람이 죽게 되면 선령신의 인도, 지도가 있음을 상제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스웨덴보르그Swedenborg의 영계일기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영계에는 우리들을 여러모로 도와주고 안내해 주는 고급령이 있다고 합니다. 만일 이런 영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안내를 잘 받으면 되겠습니다. 이 고급령들은 흡사 교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수준에 맞게 공부 내용과 스케줄을 짜 줍니다. 이 고급령들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니 우리는 그들의 지침을 잘 따르면 됩니다. (스웨덴보르그 영계일기 참고,『한국 사자의 서』103쪽) 


<나는 영계를 보고 왔다>라는 책을 쓴 임마누엘 스웨덴보르그는 1688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고, 20여 년 넘게 명부를 오간 사람입니다. 책을 통해 영혼 세계를 자세히 묘사하여 광대무변한 신명계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의 저서는 후에 괴테, 칸트, 헬렌 켈러, 에머슨 등 서양 최고의 작가, 철학자, 사회운동가 등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죽음은 혼줄이 끊어지는 것


오늘 저는 사후 세계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죽음은 육체와 영혼(유체幽體)을 연결하는 혼줄, 생명줄이 끊어지는 현상입니다. 탯줄을 끊으면서 사람이 태어나고 혼줄이 끊어지면 사람은 죽게 된다고 합니다. 상제님은 이러한 사후의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김송환金松煥이 사후死後의 일을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사람에게는 혼魂과 넋魄이 있어 혼은 하늘에 올라가 신神이 되어 제사를 받다가 4대가 지나면 영靈도 되고 혹 선仙도 되며 넋은 땅으로 돌아가 4대가 지나면 귀鬼가 되느니라.” 하시니라. (도전 2:118)


사람이 죽어 천상에 올라가서 제사를 받다가 4대가 지나야 신명계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말에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혼은 하늘에 올라가고 백인 넋은 흩어진다는 표현입니다. 동양의 고전 「예기禮記」에서는 혼백을 “혼기귀우천魂氣歸于天(혼기는 하늘로 돌아가고), 형백귀우지形魄歸于地(육체는 땅으로 돌아간다)”고 적고 있습니다. 돌아가시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은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넋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민족은 죽음 이후의 세계관에 밝은 민족이라는 것을 이런 언어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죽음과 관련된 칠성문화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 전통, 이것이 한국 문화가 가진 큰 장점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현대에 가장 많이 잊혀 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돌아가셨다’는 표현은 우리 고유문화인 칠성문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람은 칠성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나고 죽으면 다시 칠성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눈 2개, 귀 2개, 콧구멍 2개, 입 1개로 칠성 기운을 받아 태어나고 죽으면 장례관에 있는 칠성판에 누워 장례를 치렀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 덕흥리 1호분에도 칠성이 새겨져 있고 고구려의 장천1호분에도 해와 달,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습니다. 

예로부터 한 가정에서는 우리 어머님들이 정화수 신앙을 통해 “비나이다 비나이다 칠성님께 비나이다.”라는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칠성은 하나님이 계신 별자리로 하나님의 별칭이기도 합니다. 

과학에서도 북두칠성의 기운이 내려온다는 것을 증명한 바 있습니다. 한국, 미국, 일본, 러시아 과학자 125명으로 구성된 연구팀은 2008년부터 5년간의 연구 끝에 북두칠성 근처에서 극한의 우주에너지선이 내려온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칠성문화로 49재가 있습니다. 인간이 천상 신도 세계로 돌아갈 때는 49일의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망자亡者가 되어 저승에서 49일에 걸쳐 재판을 받게 되는데요. 그동안 이승에서는 망자를 위해 49일간의 정성과 함께 49재를 치러 주는 것입니다.

고인을 기리는 제사


고인을 기리는 문화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제사입니다. 얼마 전 저는 멕시코 제사 문화를 상징하는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를 봤습니다. 자손이 영정 사진을 올려놓으면 이승의 자손 집으로 갈 수 있다는 내용을 보며 마치 우리나라 제사 때 신위, 위패를 모셔 놓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제사나 명절 차례를 지낼 때도 신위를 모십니다. ‘현고학생부군 신위神位’ 할 때의 신위는 ‘신명의 자리’라는 뜻입니다. 제사상을 차려도 신위를 모시지 않으면 신명이 오지 못한다는 것과 내용이 흡사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조상신이 음식을 드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제님 말씀 중에는 “신神은 사람 먹는 데 따라서 흠향歆饗하느니라.”(도전 4:144)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 증산 상제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소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천지에만 빌어도 안 되나니 먼저 조상에게 빌고 그 조상이 나에게 와서 빌어야 뜻을 이루느니라.”(도전 9:213)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자손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가 조상님이 아닌가 합니다. 천상에서 복을 내려 주시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조상님에 대한 태상종도사님과 종도사님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우리 도생들은 언제고 수많은 조상들이 나를 보호해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과연 수많은 내 조상 성신들이 나를 감싸 주고 있고, 그 은총으로 내가 산다’라고 하는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태상종도사님 도훈)

“도공으로 신도가 내릴 때 앞장서서 밀고 내려오는 신명은 각자의 조상신이다. 조상신이 맨 앞에 서서 나온다. 신명들은 내 자손, 내 집안을 먼저 찾는다. 이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인간농사에서 자식 농사, 자손 농사가 가장 막중하기 때문이다.” (종도사님 도훈) 



나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 주고 보호해 주는 존재, 그것이 바로 나의 조상님인 것입니다. 조상님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고 조상님을 잘 모시는 것은 우리 민족만의 고유문화이기도 합니다. 그 의미를 잘 새겨본다면 우리 생활에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소중한 문화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윤회의 목적


마지막으로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있다는 윤회輪廻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윤회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인류는 우주의 봄, 여름에만 성장 발전하기 때문에 봄여름 시간의 끝자락인 하추교역기에는 윤회가 마감되고 매듭이 지어집니다. 어떤 목적으로 이 세상을 살든지 우주의 봄여름 동안 윤회하며 성장해 왔던 나의 영혼이 우주의 가을개벽기에 성숙된 인간, 성숙된 영혼으로 거듭나는 것이 우주의 봄여름 윤회의 최종 목적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삶과 죽음, 사후 세계에 대해서 상제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여러 예화들과 함께 소개해 드렸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 삶에 대한 소중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인생이 될까요? 저는 인생으로서 가장 소중한 가치는 천지 부모와 하나 된 존재가 되는 것에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와 관련된 상제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 이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天地生人(천지생인)하여 用人(용인)하나니
不參於天地用人之時(불참어천지용인지시)면 何可曰人生乎(하가왈인생호)아
천지가 사람을 낳아 사람을 쓰나니 
천지에서 사람을 쓰는 이 때에 참예하지 못하면
어찌 그것을 인생이라 할 수 있겠느냐! (도전 2:23:3)




(월간개벽 20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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